2018년 7월 27일 인쇄
2018년 8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8월호 통권 510호 |2018년 12월 15일 토요일|
로그인  회원가입
[ 개인정보보호정책 ]






























강선영 姜善永
출생 : 1925년 경기 안성
학력 : 한성준 고전음악무용연구소 입소(1937) 단국대 경영대학원 예술경영학과 수료, 연세대 행정대학원 고위정책과정 수료
경력 : 경력 :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예능보유자(1988-), 강선영 고전무용연구소 개설(1951),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1954), 한국무용협회 이사(1962), 국립무용단 안무자(1962),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1990-1992), 한국무용협회 이사장(1985-1986), 제14대 국회의원(문화체육 공보위원)(1992-1996), 국회여성특별위원회 위원(1992), 국회문공위원회 상임위원(1992), 민자당 당무위원(1993), 국회 문화체육여성특별위원회 위원(1994), 한나라당 상임고문, 한양대 무용과 강사(1998), 태평무 전수관 개관(1998-) 및 이사장, 전국 전통무용 경연대회 개최(1999-, 태평무보존회 주최) 세종대 무용원 강사(2001-2002).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이사(1994-),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원 강사(2000-),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강사(2000-),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경기도민회 부회장 겸 여성분과위원장, 예총명예회장, 중앙대 초빙교수(2003-), 현 태평무보존회 이사장
수상 : 서울시문화상, 제12회 「아시아 영화제」 무용부문 작품상(1965, 『초혼』), 국민훈장 목련장(1973), 대한민국 예술상(1975), 엑스포 공로상(1984),바웬사 특별상(1990), 캐나다 토론토 캐러밴 페스티발 안무상, 의상상, 특별상(1992)


작품활동
공연
아시아문화협회초청 일본 순회공연(1961), 도쿄 국제여학사회 초청 「동남아 무용제」 참가(1961), 「파리 국제민속예술제」 참가(1961), PATA(태평양지역 여행협회)초청 일본공연(1963), 「시드니 민속무용축제」 참가(1980), 「토론토 민속무용제」 참가(1980), 한국국제문화협회파견 「일본 민속무용제」 참가(1983), 「세계민속예술축제(CIOFF) 이탈리아 세계민속대회」 참가(1986), 한국국제문화협회파견 세계민속대회 참가(1987), 「CIOFF 프랑스 대회」 참가(1987), 「CIOFF 영국 대회」 참가(1988), 88서울올림픽 홍보사절단 일본 순회공연(1988), 88서울올림픽 폐막식 공연(1988), 일본 요카토피아 엑스포 참가(1989), 중국 광동성 초청 민속무용 공연(1989), LA 한인회관 건립 초청공연(1993), 「CIOFF 일본 대회」 참가(1995, 1999, 2000), 「한·중·일 불교문화대제전 초청공연」(1996), 일본 「오이타현 무용축제」 참가(1998), 「한성준선생 그 춤의 재현」 공연(2000), 「중국 훅호트 국제민속축제·CIOFF 내몽고 대회」 참가(2002) 외 다수
출연작
『열두무녀도』(1963) 『황진이』(1981) 외 다수
안무작
『볍열』(1953) 『목란 장군』(1955) 『농부와 선녀』(1957) 『수선화』(1959) 『열두무녀도』(1963) 『황진이』(1981) 강선영 무용 55주년 기념공연 「나의 인생·우리의 춤」(1993) 『태평무』 『무당춤』 『우리 춤·우리 향기』(2002) 외 다수
저술활동
평전
「여유와 금도의 춤」(2003, 이세기 엮음, 푸른사상)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명목리가 고향인 강선영은 전통 예술과는 무관한 가문(진주 강씨)에서 태어났다. 관가 벼슬을 하던 조부는 당대 한성준, 이동백(李東伯), 정정렬(丁貞烈) 명인들과 사랑채에 어울려 음풍농월하던 사이였다고 한다. 다만 작은 아버지가 토월회 등 연극 단체를 조직, 전국을 유랑 생활하다 할아버지한테 매맞고 아버지는 강씨를 신식 교육시킨다고 볼기까지 맞았다고 한다. 이런 가문에서 자란 강씨가 춤을 추겠다고 나서니 결국 진노한 할아버지가 모녀를 내쫓아 버려 오히려 ‘춤꾼 인생’은 자유롭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열다섯 살 때 한성준 고전 음악 연구소에 정식으로 입소하여 무용공부를 시작하였다. 서울 경운동에 있던 음악무용연구소에서 이강선, 장홍심(張紅心), 한영숙(韓英叔, 한성준씨 손녀, 『승무』 인간문화재, 1989년 작고) 씨와 함께 배웠다. 20세까지 7년간을 배우면서 15세 때 이미 일본 공연에 나섰고 서울 부민관에서 첫무대까지 가졌다. 17세엔 동양극장에서 공연된 『삼국지』 안무를 처음 맡아 주변의 시샘도 받아야 했다고 한다.
태평성대의 왕과 왕비의 춤만으로 표현한 것 중 왕비의 춤만 재현한 것이 『태평무』인데, 그녀는 1988년 12월 1일 중요 무형문화재 제 92호 『태평무』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도리깨질을 아십니까. 긴 자루를 뒤로 돌려 일단 멈췄다가 채에 힘을 주어 마음껏 내리쳐야 합니다. 처음 배울 적엔 건들거리는 도리깨 채에 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지만 익숙해지고 나면 그렇게 재미있고 힘이 날 수가 없어요.”
그녀는 1990년 2월,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회장으로 임명된 후의 인터뷰에서, 충남 천안군 수신면 한선 이씨 가문으로 시집 가 견뎌냈던 시집살이 얘기부터 꺼낸다. 엄하고 조신해야 했던 3-4년의 기간이 평생 몸가짐을 흐트리지 않게 지켜 주었다고 한다.
예총회장 자리도 잠시 맡아 있는 행정직일 뿐 그는 역시 뛰어난 춤꾼이었다. 이럴 때마다 강씨는 ‘좋았던 스승’ 한성준 선생 생각이 간절하다고 했다. 『승무』, 『살풀이』, 『태평무』, 『학춤』(신선무), 『한량무』, 『장군춤』 등 온갖 전통민속춤에 통달했던 한씨는 당대 최고 명고수로 한 시절 민속악계를 주름잡았던 인물이다.
한편, 그녀가 만든 춤을 꼽자면 우선 『학춤』을 들 수 있다. 한성준 첫 발표회에서 스승은 부친 한천오 옹이 만든 학탈을 쓰고 지방에서 전래되던 『학춤』을 추고 있다가 『학춤』에 대한 새로운 작업은 그녀가 무용소에 입소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해 겨울 스승은 그녀를 데리고 창경원으로 갔다. 그리고 『학춤』을 창작하기 위해 학의 우리 앞에 서서 학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살폈다. 학의 움직임을 그림으로 그리고 거기에 스승만이 알 수 있는 토를 달아놓은 공책 하나만으로 마침내 아름다운 『학춤』을 형상화시켜 나갔다. 일정한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그때 사용했던 부호와 기호는 그녀와 스승만이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총기가 뛰어난 그녀는 스승이 물으면 창경원에서 본 학의 동작을 그대로 해 보였다. 스승이 시킨 대로 학의 포즈를 한 채 한나절을 서 있다가 발가락이 얼어서 발톱이 빠진 적도 있었다. 이처럼 그는 스승이 『학춤』을 만드는 전 과정에 깊숙이 참여해왔다. 한성준이 초기에 만든 『학춤』의 원형은 아비학과 어미학, 그리고 새끼학이 추는 3인무였다. 체구가 작은 강선영은 주로 새끼학을 추고 아비학은 대금을 불던 김광식의 친형인 김광채, 어미학은 김명숙이 추었다.
후에 만든 『신선무』도 혼자 추는 독무가 아니라 바둑판을 가운데 두고 신선과 동자, 학들이 등장하는 드라마가 있는 작품이다. 한성준은 8곡 병풍에 그려진 신선과 동자, 백학이 노니는 무릉도원의 풍광에서 감명받아 이 춤을 만들었다. 『학춤』에 무용극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춤이 진행되는 동안 후면에 등장한 5명의 악사들이 신선의상을 입고 현장연주를 곁들이는 것이 특징이다. 신선이 도포자락을 아우를 때는 도연명의 「봄물은 못마다 가득 차고」처럼 화창감이 넘치고 학의 날개짓은 ‘천부의 고결한 품을 지닌’ 춤격으로 발레 동작 같은 현대미가 번뜩이기도 한다. 그녀는 스승으로부터 『승무』와 『살풀이춤』, 『한량무』, 『검무』, 『훈령무』, 『바라춤』, 『학춤』과 『신선무』를 섭렵한 후 맨 나중에 『태평무』를 배웠다.
『태평무』는 한성준 선생의 창작무로 생전에 가장 아꼈던 춤이다. 요염하면서도 우아하고 풀고 맺음이 분명하여 보는 이의 심사에 따라 감응의 폭은 다양해진다. 조선조 궁중 의상(부분적 변형 시도)으로 때로는 근엄하기까지 하여 『태평무』에 맛들여 놓으면 딴 춤은 싱겁게 여겨진다고 한다.
『태평무』 명무자인 강선영이 입고 추는 무복은 당의 대홍원삼(大紅圓衫)을 바탕으로 손에는 한삼, 머리는 큰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대홍원삼은 흰 바탕에 수를 놓았고 당의는 연두에 수를 놓아 남색 속치마에 빨간 겉치마를 입는다. 탐스러운 어여머리에 옥판과 화잠을 장식하고 녹원삼 속에 당의를 입고 그녀가 무대에 등장하면 객석은 벌써 기대와 흥분으로 술렁거린다. 그의 무대는 비상직전 아니면 탐색직전의 긴장과 정적을 품는다.
그녀의 『태평무』는 한국적 정태미(情態美)의 섬세함과 박진감 넘치는 춤사위, 화려한 궁중의상, 외씨버선의 발디딤새로 장(壯)과 한(閑)과 원화(怨和)를 춤 속에 용해시킨다. 인간의 가슴속에 맺힌 한을 흔연하게 풀어낸 후 흥과 신명의 경지에 도달하여 동작이 동작 자체에 머물지 않고 보다 높은 정신 세계에 닿아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태평무』는 잔걸음과 겹걸음을 서두로 하면서 남치마를 걷어올리고 홍치마가 드러날 때 흰빛 버선발로 전개되는 격렬한 발디딤새는 어떤 춤에서도 맛볼 수 없는 아찔한 경탄감을 던져준다.
모든 춤에서 고혹적인 춤 자태로 객석을 사로잡지만 무속의 진쇠장단에 맞춘 『태평무』는 관객으로 하여금 넋을 놓고 바라보게 하는 매력을 범람시킨다. 춤추는 모습은 어느 때는 계류같고 어느 때는 성난 파도같이 인간의 고통과 환희, 고뇌와 한을 다스리면서 춤이 갖고 있는 영롱성과 창만을 성취시킨다.
그녀에 의하면 “『태평무』는 춤 장단을 익히는 데만 3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생음악 연주로는 무대에서 춤추는 사람과의 장단 맞추기가 가장 까다로운 춤이다. 평론가 정병호는 그의 저서 「한국의 전통춤」에서 “『살풀이』나 『승무』는 발을 사뿐히 들어 뒤꿈치를 디디며 일직선으로 발을 놓지만 강선영의 『태평무』는 발을 옮길 때 반원을 그리지 않으면 그 장단을 맞출 수 없다는 것과 잔발을 딛고 발을 돌리며 굴리고 잦은 깨금발을 띠고 잔가락을 넣으면서도 발짓이 맞아 떨어져야 하는 것이며 이 춤에서 발을 구르는 동작은 그의 춤만이 가진 멋 그리고 흥과 신명, 박진감 넘치는 발짓춤의 기교는 『태평무』에서 가히 그녀를 능가할만한 인재는 아직까지 없어 보인다”고 평했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