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살롱

그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60년대 말. 잔거라면 아저씨들이 출퇴근에 쓰는 아저씨 잔거나, 쌀집, 막걸리 집에서 배달용으로 쓰는 짐 잔거가 고작이었다. 그나마 ‘일제가 좋다’며 국산 잔거에 찬밥을 주던 때다. 기어가 달린 잔거는 있는지도 몰랐고, 아버지 잔거 몰래 타고 나오는 것도 눈치껏 해야 할 때다. 하지만 삼시 세끼 굶지 않으면 잘 사는 집이라 불리던 이때에도 ‘자전거왕 엄복동’ 잔거를 파는 자전거 가게들이 을지로에 몇 있었다. 미군들이 타던 걸 손질해 파는 중고 시장이 있었던 거다.
을지로 간다고 잔거 타고 집 언덕길을 달려 내리다 택시에 받쳐 OTB(Over the bar, 핸들 위로 날아가 떨어지는 사고)를 했다. 남들은 평생 한 번 할까 말까 한 OTB를 어린 나이에 한 거다. 그 사고로 아직 그의 오른쪽 귀 뒤에 칼 댄 자국이 남아 있고, 오른쪽 귓구멍은 왼쪽보다 작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안타까운 일은 잔거 금지령이 내려진 것. 부모님 말씀 따라 30년을 참고 살았지만 더는 못 참고 잔거에 다시 오른 게 마흔일곱 되던 해이다.
서른 해 넘게 참았던 뒤탈이라 해야 할까, 그의 두 바퀴 본능은 거침이 없었다. 한니발처럼 알프스를 넘었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잔거로 완주하기도 했다. 또 다른 두 바퀴 사랑은 오토바이다. 여섯 해 앞서인 2016년 여름, 태백을 떠나 영덕까지 2박 3일 같이 잔거질을 한 적이 있다. 태백서 통리를 지나며 백두대간을 넘어서면 삼척 원덕까지 내리막이다. 내가 잔거질에 앞장서 길잡이를 했는데, 잔거질을 잘해서가 아니라 내가 이쪽에서 태어나 길도 잘 알고 이 코스도 내가 제안한 까닭이다. 태백에서 떠나 통리를 지나고 내리막에 접어들 무렵 그가 말한다. “오토바이 타고 와봤던 길이네.”
잔거가 두 바퀴이듯이 그의 잔거 사랑은 잔거질 외바퀴에서 나아가 또 다른 바퀴로는 수집가의 길을 걷게 했다. 그가 여태껏 모은 자전거의 수와 희귀성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부러움을 사고 있다. 잔거의 역사가 시작된 프랑스에서 드라이지네를 하나 경매받았는데, 프랑스 정부가 국보급인 이 초창기 잔거를 프랑스 밖으로 가져 나갈 수 없다고 하다가 한국계 입양아 플레르 펠르랭이 중소기업 및 디지털 장관이 되면서 오케이를 해줘 한국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그가 수집한 잔거들 가운데 일부는 용산에 있는 LS타워 1층과 2층에 누구나 볼 수 있게 전시하고 있다. 잔거의 역사를 한눈에 읽을 수 있는 귀한 잔거들을 보는 눈 호강을 할 거다.
그에게 노익장이란 어울리지 않는다. 잔거에서 떠나지 않는 그야말로 젊은이보다 더 젊게 사는 그다. 요즘도 잔거를 좋아하는 젊은이들과 70km 가까이 타는 주말 라이딩을 마다하지 않는다. 가끔 “새벽까지 밖에” 있었다며 힘들어하며 시작한 잔거질도 돌아올 때는 누구 못지않게 활기에 넘치는 그다. 누구라도 잔거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그의 잔거 친구가 된다. 내 미국 친구가 위의 태백-영덕 잔거질을 같이하고는 “미국에서는 저 정도의 신분에 있는 사람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꿈도 못 꾼다”며 잔거를 통한 그의 스스럼없는 함께하기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그는 대한자전거연맹 구자열 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