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2018년 3월14일 늦은 여덟 시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수요춤전’ 정은혜와 황희연 편이 공연되었다. 국립국악원은 ‘명인동행(名人同行)’시리즈로 3월의 4주간에 여덟 명의 명인을 초청하여 춤전을 열었다. 정은혜(충남대 무용학과 교수) 명인은 두 번째 주를 담당하였고, 춤은 정은혜의 『학춤』, 『새가락별무』, 『대비』와 황희연의 『산조춤』, 『장고춤』, 『진도북춤』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립국악원이 마련한 풍류사랑방 「수요춤전」은 2015년부터 시작하여 전통춤을 사랑하는 춤 애호가들의 관심을 고조시키는 춤판 중의 하나이다. 정은혜 춤은 한꺼번에 매혹시키지 않는다. 서서히 침투하며, ‘물들어가는’ 모든 것들로 인해 그 깊이를 성찰케 하는 우리 춤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 그녀는 전통춤의 수호자로서 끊임없이 우리 춤에 대한 분석과 가치 창출을 위해 대중적 공감과 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왔다. 수사가 없는 조명 아래 온전히 자신의 춤에서 보여준 핵심어는 ‘비움’, ‘고결함’, ‘동행’이었다.
그녀의 춤은 대전시립무용단 예술감독을 전후로 1) 연구와 꾸밈, 쌓아올리기 단계 2) 완성과 웅비의 단계 3) 비움과 해탈의 단계에 이르는 세 단계로 나뉜다. 이 단계에 그녀의 세 작품을 오버랩 시켜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외부적 문화 변동과 점점 자본주의의 포로가 되어가는 춤 현실 속에서 우리 춤의 미학적 우월을 견지한 것은 정은혜 춤의 미덕이자 자존이다.
정은혜는 자신의 수련 시대의 과거를 흑백 필름의 시대가 아닌 색채필름으로 환치하고, 길고 지루한 시간을 낭만적 ‘느림의 미학’으로 채우고자 했다. 이지적 춤 보다는 가슴으로 느끼는 춤을 구사했다. 그것은 논리를 뛰어넘는 예술가 정신을 소지한 것이었다. 낭만적 열정으로 채워나간 그녀의 안무노트에는 우리 춤 철학의 명료한 교훈들을 정제한 것들로 가득 채워졌다.

학자적 양심과 춤 연기자로서 지향점을 보여준 정은혜의 대표적 춤은 십장생 중의 하나인 학을 우선 대상으로 삼는다. 고결한 전통미를 보여준 『학춤』은 호흡과 기교를 섞어 관객의 집중을 요하는 고난이도의 춤이다. 학이 되고 싶은 선비의 고결한 품격을 보여준 『학춤』은 바람 잦은 춤 사회 풍토에서 일관되게 자기 주관과 풍향계를 갖고 가겠다는 의지의 표상이었다.
『학춤』은 정은혜의 독무, 한민족의 얼과 혼이 깃든 고고한 춤이다. 하늘과 소통하고 싶은 인간의 희망과 기원을 바탕에 두고 자유와 영원의 세계로 승화하고자하는 춤이다. 학 탈을 쓰고 학의 움직임을 표현하며 추는 학춤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다. 날개의 떨림과 날렵한 날갯짓, 외발로 서있는 고도의 기능은 장기간의 수련과 춤 수행자의 정신이 범 우주적 차원의 몰아일체로 승화 될 때 비로소 춤의 실체가 드러나는 예술성 높은 춤이었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 조선전기의 「악학궤범(樂學軌範)」, 조선말기의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 학춤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학춤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전래되었다. 조선말기 이후 한동안 단절되었던 『학춤』은 한성준 선생에 의해 한국 최초의 현대식 극장 부민관(현 서울특별시의회 건물)에서 1935년 예술성 높은 춤으로 복원되었으며 김천흥(金千興) 선생으로 이어져 정은혜(鄭殷惠)로 계승되었다.

정은혜는 현재적 삶을 긍정하고 전통적 뿌리를 숭상하며 현재와 과거를 미학적 예술적 관점에서 해석해왔다. 현재적 삶을 중시하며, 자신의 이상을 극대화 하면서 전통의 가치를 극대화 시킨다. 전통적 가치를 내세우면서도 창작의 자유정신을 구현하는 독창적 방식을 여성성에서 찾아낸 그런 작품 중의 하나가 섬세한 감정을 격조 있고 우아하게 풀어낸 산조춤이다.
정은혜의 독무, 산조춤 『새가락별무』는 일반 산조가락과는 다른 성금연 선생의 가야금창작곡 「새가락별곡」을 반주로 한다. 이 춤은 초연 때 산조춤 『청천』으로 발표되었으나 성금연의 장녀인 지성자 선생이 『새가락별무』로 권유하여 변경되었다. 정은혜는 20대 초반인 1978년 성금연의 차녀인 지미자를 통해 「새가락별곡」을 알게 되었고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충남대(1995년)에 부임 후 산조춤 『새가락별무』를 1차 완성하여 2003년 4월16일 호암아트홀 무대에서 초연으로 선보인바 있다. 지미자의 연주로 『새가락별곡』인 15박, 10박, 6박, 5박으로 해서 마지막 4박 올림채가 빠진 곡(10분)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2009년의 공연에는 성금연의 4녀인 지순자의 연주로 『새가락별무』가 대전문화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랐다.
2013년에 4박 올림채까지 전체 곡 16분 과정의 음악이 지성자의 연주에 의해 완성되었고 전 과정의 춤이 발표되었다. 결국 『새가락별무』는 태동한 지 25년 만에 초연된 셈이 되었고 지미자, 지순자를 거쳐 마지막으로 지성자의 음악으로 완성되었다. 산조춤 『새가락별무』는 푸살(15박), 터벌림(10박), 도살풀이(6박), 봉등채(5박), 올림채(4박) 장단 과정의 춤이다.
『새가락별무』는 정은혜 인생의 아픔과 굴곡 속에서 삶을 초월하여 푸른 하늘처럼 의연한 마음을 닮고 싶어 안무한 작품이다. 깊은 호흡에서 뿜어내는 기가 객석에 와 닿을 듯하다. 한국적 장단 속에서 우리 춤사위로 살아나는 푸른 하늘, 이 춤을 추며 무용가 정은혜는 갈등의 마음을 다스렸다. 음악적 과정의 숙성만큼 긴 숙성 과정을 거친 춤은 진정성을 담보하고 있었다. 음악: 가야금독주(지성자), 장구(윤재영).

정은혜는 가을걷이를 하면서 삶을 예찬한다. ‘눈물강’ 너머 삶을 이어온 자의 세상 바라보는 따스함이 전해온다. 기교는 무르익었고, 세상을 읽은 자는 비움을 택했다. 동행의 아름다움과 어울리면서 남을 실망시키지 않기로 다짐한다.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며, 타자에 대한 사랑을 나눔이라 깨닫는다. 전통, 나, 타자는 삼위일체를 이룬다. 그래서 『대비』의 춤 선은 아름답다.
정은혜, 이금용(충남대학교 강사)의 이인무로 2017년 5월에 초연되었던 『대비』는 전통학춤의 이미지와 창작학춤을 같은 무대에서 보여주면서 새로운 조화를 모색한다. 현대가 전통을 보완하고, 보듬는 동행을 전제로 한다. 전통과 창작이 영상과 춤으로 한 무대에서 대비됨으로써 새로운 조화를 창조한다. 농축된 내면세계의 표출과 춤 기교는 완벽한 일체감을 이룬다.
우직한 전통의 계승정신과 현대적 창작 모습의 자연스런 대비는 투명한 바람 속 풍경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흥미롭다. 전통과 창작의 두 가지 요소와 사제지간의 두 명의 무용수가 데칼코마니처럼 만나 복사꽃 정취를 기억해낸 『대비』는 같은 것의 다름을 비교하며 보는 춤이다. 이 이인무는 심도 깊은 연기력과 깔끔한 대비를 보여주면서 현대적 함의로 표현된다.
‘음악의 느림’은 대금과 단소 연주로 현대성을 가미하고, 성금연의 가야금 산조의 중모리와 중중모리로 빠름의 완급을 조절한다. 『대비』는 우리 춤 향방의 이상적인 답안이다. 춤은 춤 도량(道場)의 모방과 전이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춤의 순수와 확장이 공존하는, 순응의 바람직한 형식을 보인다. 전통의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전복적 창의력은 춤 발전에 기여한다.

「세종국제무용제」 운영위원장인 정은혜는 『처용무』와 『살풀이춤』 이수자로서 『춘앵전』의 춤사위, 궁중정재의 형식과 특성, 『처용무』의 무의(舞意), 『살풀이춤』의 느림과 비움의 춤사위, 한국 『학춤』의 역사적 생성과 아름다움을 연구해왔다. 이 연구는 그녀의 춤에 이식되었고, 그녀는 관객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가슴으로 느끼는 춤을 추면서 공감대를 확장해가고 있다.
정은혜 춤의 유형과 양식은 정열을 극복하고 성찰과 사유를 통해 인간의 심원에서 우러나오는 밝고 진솔한 것들로 만들어진 것이다. 소박하고 정갈한 소시민적 것에서 얻은 위대한 양식은 그녀의 춤 예술을 아름답게 하고, 위대한 것으로 만들었지만 그녀는 비움을 택한다. 비우고 즐기는 자는 위대한 성숙에 이르는 법이다. 바람직한 무용가의 모습이다.
‘수요춤전’에서 보여준 정은혜의 세 편의 작품은 전통의 보존과 동시대 사람들이 즐겨하는 새로운 문화원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전통춤 속에서 미묘하게 진화한 춤들은 원 소재와 다른 색감의 의상, 리듬과 악기 편제에 있어서의 변주된 음악 등 창의적 변화들이 감지된다. 시대가 새로운 문화원형을 창출한다. 정은혜의 춤은 진정성이 돋보이는 고품격 예술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