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7일 인쇄
2018년 1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1월호 통권 503호 |2018년 10월 18일 목요일|
 

춤 스크랩북

 

생각나는 노래들
-




조동화(趙東華)(月刊 춤 발행인)

돌배나무 가지에 걸린 짚신짝
돌배꼭지 익어서 떨어져도
대롱대롱 혼자서 춤만 추지요.

돌배나무 가지에 걸린 짚신짝
지난해에 누나가 돌배 치다가
걸어 놓고 가신 뒤 왜 안 오시나…

보통학교 창가시간에 배운 유일한 우리말의 이 동요는 지금은 나의 애창곡의 하나이다. 이 노래는 허부자(許富子)라는 여선생님이 풍금을 타시며 가르쳐주신 것인데 아직도 나는 그 선생님의 별로 높지 않으셨던 음성을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 나의 세계에서는 허 선생님이 제일 이쁜 여자였기 때문에 필경 그 목소리도 그런 감정의 맥락에서 들려졌을 것이다. 그런데 허 선생님은 우리와 얼마 같이 계시지 않고 곧 시집을 가셨는데 그때 나의 슬픔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었다.
지금 나에게 「돌배나무」가 어떤 슬픔 같은 것이 있다면 그때의 나의 심정과 연유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해방될 때까지 내가 고향의 국민학교 대용교사로 지내던 시절처럼 망막하고 절망적인 때는 없었던 것 같다.
요즘도 문득 그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오늘의 내가 얼마나 행복한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어떻든 그때의 일이 문득 생각나면 으레 그때에 부르던 일본 노래가 하나의 순서처럼 떠오른다. 「데부네(出船)」라는 노래였다.

이밤 떠나는 배 그리워라
어두운 파도 위에 눈이 내린다
배는 안 보여도 이별의 노래인가
저 멀리 갈매기는 울고 있어라(意譯)

태평양전쟁, 나의 영혼은 어딘가에 정착 못하고 떠다니는 구름처럼 방황하던 때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 빈 교실에 혼자 남아 뭔가를 읽으며…, 편지도 아닌 일기도 아닌 가슴속의 얘기를 쓰던 그때. 이 「데부네」처럼 내 가슴에 와 닿는 노래는 없었다.
눈이 내리는 밤바다로 떠나야 하는 외로운 길손의 심정으로 혼자서 이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희망가」도 나는 좋다. 사실 어머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분위기의 노래는 이 「희망가」였다.
왜 내가 그 노래를 이렇게 인식하게 됐는지는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필경 내가 아주 어린 아이 때부터 어머니가 이 노래를 부르셨을 것이니까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머니는 일생동안 찬송가를 많이 부르셨으나 어떻든 나에게 가장 어머니의 노래로 느껴지는 바로 그 노래가 「희망가」이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 너의 희망이 무엇인가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 네 맘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 곰곰이 누워서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속에서 / 또다시 가는구나

어머니 일 말고도 이 노래에는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황국신민의 맹서’는 한반도 북쪽 끝인 우리 시골에서는 순사에 의해 집요하게 강요됐었다. 두만강 나룻배도 이 맹서 세 토막을 암송하지 않으면 태워주지 않았다.
우리 아재비(왕고모님의 아들)의 처가댁이 강 건너 간도 땅에 있었는데 그 장모가 조선에서 사는 딸을 만나려고 몇십 번이나 뱃전까지 나왔다가는 결국 이 ‘맹서’를 한 마디도 외우지 못하여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사실 농부의 아낙네가 일본말로 된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한다는 것은 노력의 부족이란 차원이 아니고 애당초 그런 기능이 만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루터를 지키는 순사들은 막무가내 배를 태워주지 않았다.
어떻든 그 어느 날 저녁 아재비가 우리 어머니에게 장모의 이런 딱한 사정을 말하고는 그 자리에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우면서 조용히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때 그는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가슴이 이상해졌던 일을 기억한다. 해방되는 날까지 나는 끝내 그 아재비의 장인장모를 보지 못했다.
애창곡이 아니더라도 이상한 향수가 있어서 기억되는 노래가 있다. 그것은 내가 조선에 있는 중학교로 전학해 가야 했기 때문에 그만둔 북간도에 있는 은진중학교의 교가인데, 무섭고 두려운 일본시대, 학교에선 조선말을 하면 안 되던 시대였는데도 이 교가만은 조선말로 부를 수 있었다.
입학식이나 졸업식에서 강당이 터지도록 전교생이 부르는 이 노래―감격스럽기도 하면서 슬픔 같은 것 때문에 가슴이 찡하던 일을 기억한다.

발해 나라 남경터에
흑룡강을 등에 지고
백두산을 앞에 놓은
장하다 은진(恩眞)
넓은 들판 이 땅 위에
젊은 배달 이내 몸들
만세반석 터가 되는
강하다 은진…

지금은 가사의 많은 부분을 잊었는데 간혹 몇 사람 안 남은 그때 동창들이 주석의 마지막 장식으로 이 교가를 부르면 줄줄 그 노래가 떠오르는 것도, 또 그때의 그 감격과 한없는 슬픔이 하나도 변하지 않고 상기되는 사실 등이 그저 이상하기만 하다.

<자유공론(自由公論)> 1986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