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7일 인쇄
2018년 1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8년 1월호 통권 503호 |2018년 8월 15일 수요일|
 

미술살롱

 

우리는 죽지 않았다(…)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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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숙(鄭在淑)(미술기자)

무대미술가 이병복(1927~2017) 선생을 제대로 만난 때는 2013년 5월 초였다. 연극 담당 기자를 하며 극단자유의 무대를 들락거렸지만 잠시 스쳐지나가는 정도였다. 2일 오후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 막을 올린 「이병복 3막 3장」 프리뷰에서 주인공인 선생이 과묵하셔서 취재가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어두컴컴한 전시장 구석에 선 선생은 여간해서 불빛 쪽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진기자들이 불평을 할 정도였다. 무대 뒤에서 주로 일해 버릇해서 밝은 조명 아래는 영 어색하다는 말씀이었다.
구랍 29일 선생의 부음을 들으며 그날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대 뒤의 여자’는 그늘에서 그늘로 느리게 움직였다. 그 동선(動線)은 자신의 무대미술과 의상처럼 곡선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의 무거운 입이 열리며 묵직한 한마디가 나왔다. “무대미술가란 말 쓰지 마세요. 뒷 광대라 해주세요.” 앞 광대 배우를 뒤에서 건사하는 일꾼임을 자임하는 그는 ‘가(家)’자 붙는 것도 싫다고 했다.
그날, 미술기자의 눈으로 본 이병복의 옷과 무대는 한마디로 ‘어미의 정(情)’이었다. 그가 여일하게 붙잡고 있는 한지(韓紙)와 삼베는 굴곡 많은 삶으로 서러웠던 한국 어미의 마음을 대변하는 재료였다. 전통과 자연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는 그의 무대는 땅의 색과 질감, 하늘의 형과 변전(變轉)을 닮았다. 바스락거리는 종이에서는 요기(妖氣)가 흐른다. 채우기보다 비우기에 몰두한 텅 빈 무대에서 배우들의 움직임으로 바람이 일었다.
이병복 선생의 부군은 화가 권옥연(1923~2011)이다. 감히 짐작하건데 가정 생활에서도 권 화백은 앞 광대요, 이 선생은 뒤 광대였을 것이다. 부부가 경기도 남양주시에 만든 ‘무의자 박물관’은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힘이 부치는 공간이었다. 권 화백의 호인 ‘무의자(無衣子)’는 벌거벗은 사람이란 뜻이다. 전국을 돌며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한 잘 생긴 한옥을 모아다 조성한 박물관 일로 두 사람은 기진맥진했으나 끝내 포기하지 않고 지켜냈다.
문화 담당 기자로서 고인을 가장 잘 아는 분에게 추도사를 부탁했다. 극단자유의 예술감독인 김정옥(85) 선생이다. 해외에 머물던 김 선생은 짧지만 강렬한 오비추어리를 보내왔다. 고인의 자유로운 영혼과 창조적 예술성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무대의상과 미술장식으로 터져 나왔던 과거를 회상하며 그는 이렇게 기원했다.
“‘우리는 죽지 않았다. 죽어도 죽지 않았다.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라고 함께 외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대표작 「무엇이 될고 하니」의 대사에서 따 온 극단자유의 구호 말입니다. 저승에서도 기죽지 않고 ‘이병복은 있다’고 휘젓고 다니실 거라 믿습니다.”
이병복 선생님, 부디 내세에서도 뒤 광대로 행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