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8일 인쇄
2017년 11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17년 11월호 통권 501호 |2018년 9월 19일 수요일|
 

국악살롱

 

창극 ‘산불’, 장영규의 음악이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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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尹重剛)(국악평론)

창극 「산불」이 아쉽다. 사실성도, 여성성도, 부족하다. 스토리는 ‘산불’이었으되, 스타일은 ‘산불’이 아니었다. 차범석은 왜 차범석인가? 첫째, ‘사실주의 극’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사실주의의 기본은 모든 상황이 마치 현실처럼 느껴져야 한다. 창극 「산불」에는 상황(狀況)이 있으나, 실황(實況)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상대에게 하는 말이라면 정감이 부족하고, 관객을 향한 것이라면 설득이 부족하다.
둘째, ‘여성성’을 떠난 차범석을 설명하기 어렵다. 차범석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어머니의 아들’이다. 그는 일찍이 여성들의 얘기를 잘 들었던 남자(소년)이고, 성장하며 여성들의 심리를 잘 그려내는 남자(작가)가 되었다. 차범석의 「산불」은 ‘가부장’적 남성이 부재한 곳에서 벌어지는 여자의 얘기다. 창극 「산불」은 어떠했나? 여배우간의 에너지가 뒤섞이지 못한다. 창극 ‘산불’에는 ‘까마귀’와 ‘죽은 사람들(魂靈)’이 등장한다. 원작 ‘산불’이 사실주의 연극에 뿌리를 둔 측면에서 볼 때도 그렇고, 단순한 스토리일진 몰라도, 그 안에 농염한 에너지를 담고 있다. 이걸 소리를 통해서 잘 구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국립창극단의 배우들이 얼마나 잘했을까?
왜 이런 설정을 했을지 의구심이 생긴다. 물론 ‘창극’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창극은 사실주의적 연극이 아니기에 일단 그렇다. 아울러 창극에는 이미 동물 캐릭터나, 죽은 사람의 혼령은 매우 익숙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부족함이다.
이런 두 캐릭터는 왜 등장했을까? 첫째, 대극장 무대에서 원작의 스토리 상 등장하는 배우들만으로 허전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둘째, 남성역할이 거의 중요치 않은 「산불」에서 창극단 배우들의 전원출연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아무래도 좋다. 의도와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 거다. 그러나 이 캐릭터는 너무도 피상적이었다.
대숲에서 벌어지는 점례(이소연)와 규복(김준수, 박성우)의 정사는 어떠했는가? 전쟁에 희생된 남녀의 골 깊은 상처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간절한 애욕(愛慾)이 복합되면서 관객이 뭉클하게 만들어야 했거늘. 이를 바라보는 혼령의 대사(노래)는 극적 몰입을 방해한다.
창극 음악을 맡은 장영규는, 여기서도 ‘장영규다운’ 음악을 만들었다. 배우와 소리를 받쳐주는 음악이 아니라, 상황과 심리를 잘 그려내는 음악이다. 기존의 일반적인 창극음악처럼 작창(作唱)에 화성과 리듬을 덧입는 방식에서 벗어났다. ‘소리 따로’, ‘음악 따로’, 마치 투 트랙으로 가는 듯 했지만, 결합방식은 고차원이다. 고수(鼓手)가 없는 창극에서, 음악적 고수(高手)인 장영규의 방식은 설득력이 있다. 장영규음악에겐 익숙해도, 창극음악에선 매우 신선하다.
이번 공연에선 분명, 기존의 국립창극단의 작품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배우들의 대사와 노래가 아주 잘 들릴 건 사실이다. 더불어서 어떤 ‘장단’부터 먼저 설정해놓고 작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장단을 배제하면서 대사와 노래가 넘나드는 방식은 아직은 창자(唱者)와 관객에게 모두 생경해도, 한 번쯤 시도하고 성과를 낼 수 있는 접근법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공을 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