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십 년 전, 춘천으로 이사 와서 알게 된 두 친구와 진부령을 넘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가 아마도 여름이 끝나가던 무렵이었는데, 그때 고갯마루 길섶에 울긋불긋 솟아 핀 칡꽃으로 장관을 이룬 모습이 문득 문득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고갯마루 가득했던 칡꽃 향이 문득 문득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미시령 터널이 생기고부터 진부령은 진부해졌다
셈이 빠른 도시인들은 구태여
굽이굽이 진부를 돌아 넘지 않는다

초고속 인터넷이 생기고부터 느린 단어들은 진부해졌다
약삭빠른 젊은 시인들은
꽃과 구름, 어미와 누이를 돌아 넘지 않는다

귀농 삼 년, 귀향 삼 년의 농부 둘과 시인 하나,
동갑내기 초짜 셋이서 의기투합 진부를 넘는다
고갯마루 길섶 넝쿨 위로 구불구불 칡꽃 향기 가득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만, 다
취했다
- 박제영, 「진부」 전문

갈등. 서로의 입장, 견해, 이해관계가 달라서 생기는 불화나 충돌을 가리켜 흔히 ‘갈등’이라고 하지요. 갈등이라는 말, 한자로 풀면 칡(葛)과 등나무(藤)를 조합한 말이지요. 칡과 등은 둘 다 덩굴 식물이라 주변의 무엇이든 휘감아 자라지요. 그런데 이 둘의 줄기가 휘감아도는 방향이 서로 다르다고 합니다. 칡은 시계 방향으로, 등나무는 그 반대 방향으로 말이지요. 그러니 이 둘이 만나 서로 얽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도저히 풀 수 없는 지경까지 되고 마는 거지요. 그 모습을 일러 갈등이라 했던 것인데요.

하동팔경(河東八景)이라는 말이 있지요. 경상남도 하동에서 만나는 여덟 개의 절경을 일러 하는 말인데요. 화개동천(花開洞天) 십리 벚꽃길이 일경(一景)이요, 그 길 따라 걷다 끝자락에서 만나게 되는 쌍계사(雙溪寺)의 가을이 이경(二景)이요, 쌍계사에서 지리산 위로 더 오르다 보면 만나는 불일폭포(佛日瀑布)가 삼경(三景)이라 했지요. 몇 해 전인가 부모님 모시고 화개 장터도 둘러보고 내친 김에 하동 일경, 이경, 삼경을 돌아 청학동으로 해서 하동 여행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팔경을 다 보진 못했지만 제법 길게 하동을 돌아왔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쌍계사에서 처음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라는 말을 들었더랬는데요. 신라 성덕왕 때, 대비(大悲)와 삼법(三法)의 두 스님이 당나라로 건너가 중국 선종의 육조(六祖)이신 혜능(慧能) 스님의 정상(頂相, 두개골뼈)을 모시고 왔는데, 꿈에 “지리산의 설리갈화처에 봉안하라”는 계시를 받아 그 자리에 절을 지었고, 그 절이 바로 쌍계사라는 것입니다. 눈 쌓인 계곡에 칡꽃이 피어있는 곳, 그곳이 바로 쌍계사입니다.

아, 칡꽃을 얘기하려던 것인데, 자꾸 엉뚱한 곳으로 흘러갑니다. 엉뚱한 얘기가 더 길어지면 안 되겠지요. 이쯤해서 본래의 얘기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칡은 다년생 식물인데, 겨울에도 웬만한 추위에는 결코 얼어 죽지 않지요. 모질고 독한 생의 의지! 대부분의 줄기가 엄동설한을 견디어 끝내 살아남아 칡의 뿌리는 점점 더 깊어지고 칡의 줄기는 점점 더 굵어집니다. 그렇게 칡은 산을 점령하고 들을 점령하기도 하고요. 칡은 태어났을 때는 풀이었지만 자라면서 마침내 거대한 나무가 되는 참 묘한 식물입니다.
칡은 예전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부모세대 때만 해도 대표적인 구황작물이었습니다. 봄에 새로 돋은 순은 나물밥으로 먹기도 하고, 칡 가루에 녹두 가루를 섞어 국수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차로도 마시고…. 그리고 무엇보다 예나 지금이나 칡(즙)은 최고의 숙취 해소제이기도 합니다. 칡즙에 계란 노른자위 둥둥 띄워 마시면 숙취도 해결되고, 허기도 해결되던 시절이 있었지요. 아, 칡즙의 맛도 이게 참 묘한 맛입니다. 처음에는 쓰다가 중간쯤에는 시다가 마지막에 이르면 달게 느껴지거든요. 칡즙의 단맛은 쓴맛과 신맛을 견뎌낸 후라야 경험할 수 있는 맛이니, 인생을 느끼게 해주는 맛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저의 주관적인 맛이고 저의 주관적인 해석이긴 합니다만.
그런데 혹시 칡꽃, 갈화(葛花)를 본 적이 있는지요. 그 향기를 맡아보신 적이 있는지요. 요즘 도시에서는 칡꽃은커녕 칡도 보기 힘드니 말입니다.

“무리 지어 피어 있는 칡꽃을 보는 일은 여간 즐겁지가 않다. 밋밋한 산등성이를 온통 뒤덮고 있는 칡덩굴은 꽃송이가 이파리 사이를 비집고 하늘을 향하여 피어난다. 소나무나 참나무를 휘감고 올라가는 칡덩굴은 줄기를 타고 마치 포도송이처럼 줄줄이 피어나는데, 잘 익은 포도보다도 더 향긋한 냄새가 온 산을 휘감는다.
칡꽃은 하나의 송이에 수도 없이 많은 꽃잎이 피고 진다. 그래서 칡꽃을 채취할 때는 송이째 따지 말고, 다소 시간이 걸리고 수고스럽더라도 반드시 꽃잎을 하나하나 따야만 한다. 송이째 꽃잎을 따면 한 송이에서 몇 개의 꽃잎을 채취하는 걸로 다시는 칡꽃을 볼 수 없게 되지만, 하나하나 꽃잎을 따면 며칠 후에는 그 자리에서 새로이 피어난 꽃잎을 또다시 채취할 수 있다.”
- 이용성, 「야생초차-산과 들을 마신다」(시골생활, 2007) 중에서

선홍빛이랄까 자줏빛이랄까 붉은색이랄까 그 불그스레한 색과 달콤새콤한 향을 지닌 칡꽃은 누구는 포도송이를 닮았다 하고, 누구는 뿔을 닮았다 하고, 또 누구는 지팡이 같다고 하고 또 누구는 털실로 뜬 목도리 같다고도 합니다. 보는 이마다 다르게 보이는 꽃이지요. 하여튼 그 꽃을 딸 때는 송이째 따서는 안 된다고 하네요. 황금알을 낳는 거위 배를 가르면 안 되듯이 말입니다.

서두에 하동팔경, 화개 장터 얘기를 잠시 했더랬는데요. 지리산과 하동과 화개 장터와 칡꽃, 하면 떠오르는 시인이 있지요. 칡꽃이 등장하는 시 - “내 나룻배의 뱃머리는 지금 온통 칡꽃으로/ 뒤덮여 있습니다”(「그리운 폭우」), “칡꽃 향기 달빛 쏟는/ 선운사 도솔암에서 하룻밤 비럭잠을 잤습니다”(「도솔암 풍경」),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바닥에서도 아름답게」), “모두들 그 무엇인가를 앓고 있었지/ 지리산 골짝 보랏빛 칡꽃송이를/ 송지면 황톳길의 쑥국새 울음을”(「산읍에서」), “지리산 아래 토지면에는/ 지금쯤 칡꽃이 미치게 피어나고 있지”(「칡꽃」) - 를 어느 누구보다 많이 쓴 시인이기도 하고요. 바로 곽재구 시인입니다.
혹시, 하동팔경 보러 가시려거든, 눈 쌓인 계곡에 칡꽃 피어있는 곳, 쌍계사를 가시려거든, 화개 장터 들러 가시려거든, 곽재구의 시 「화개 장터」는 꼭 챙겨 가시기 바랍니다.

탁수기씨의 화개 장터에서
반달낫 갈며 한 오십 년 살았지
화개나루에 소금배 들고 복사꽃 피던 이팔청춘에
처음 쇳물 끓이고 풀무질 익혔지
된장 내음 땀내 적시는 저녁 나절이면
운천리 백사장에 누워 하늘의 별을 세었지
아니 아니 운천리 안열 부락 김초시네
둘째딸 생각으로 별이 보이지 않았지
작은 토담 타고 돌다 칡꽃 한 묶음 깨금발로 던지면
꽃내음보다 먼저 토방문이 열리고
그때 처음 사랑을 알았지
섬진강 푸른 강물과 지리산 산바람이
어느 산곡에서 속삭이다 함께 어둠에 드는지도 알았지
그 이쁜 전라도 가스나 동란 끝나고 죽었지
산사람 밥 한 솥 푸짐하게 해낸 죄로 강물되어 떠났지
탁수기씨 화개 장터에서
반달낫 갈며 한 오십 년 살았지
고스레 고스레 거칠은 강바람에 소주 한잔 부으며
앞으로도 한 백년 운천리 백사장 별을 헤겠지
- 곽재구, 「화개장터」 전문

모질고 모질어서, 독하디 독해서, 엄동설한에도 죽지 않고 살아서, 보잘 것 없는 풀로 태어났지만 자라고 자라 거대한 나무가 되어 마침내 산과 들을 뒤덮어버리는 칡. 가장 낮은 바닥에서 태어났지만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르는 칡. 동서고금 바닥을 뒹굴면서도 그 목숨을 이어온 민중들의 삶을 무척이나 닮은 식물입니다. 화개 장터의 저 탁수기 씨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품은 꽃이지요. 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