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살롱

대작가의 데뷔작. 오늘의 대작가를 만든 공식적인 출발점이다. 그런데 그 데뷔작이 작가의 기억 착오에서 비롯된 산물이며, 진짜 데뷔작은 따로 있다면?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작가 이현세의 데뷔작으로 알려진 ‘1978년 작’ 「저 강은 알고 있다」은 데뷔작이 아니다. 이현세의 데뷔작은 1979년 3월 9일 화성사에서 상하권으로 발행된 「나는 한국인」이다
전말은 이렇다. 이현세는 데뷔 전 여러 작가를 전전하며 생계로 남의 그림을 그리다가 방위를 다녀와서 무명작가로서 화성사에서 몇몇 작품들을 펴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저 강은 알고 있다」이다. 이현세는 그동안 자신의 책, 전시회, 이력, 언론 인터뷰 등에 ‘데뷔작 「저 강은 알고 있다」(1978년)’라고 밝혀왔다. 이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작가 본인의 주장인데다, 이 시기 자료들이 워낙 희귀해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나는 우연히 데뷔 시절 이현세 작품들의 출판 이력을 확인하면서 데뷔작이 잘못 공표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선 「저 강은 알고 있다」는 1978년에 출간되지 않았다. 이 작품은 간기에 적시된 바, 1979년 5월 9일(화성사, 上下권) 출간됐다.
그러면 작가는 왜 이 작품을 1978년에 펴냈다고 알고 있는 것일까? 이현세는 “나는 지금까지 「저 강은 알고 있다」가 1978년 출간됐다고 기억해왔다. 아주 오랫동안 그것에 대해 확인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내 기록에 대해 일일이 자료 찾아보며 확인하는 스타일은 아니다”라면서 “작가의 기억에 착오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을 바로잡는 것은 만화연구가들의 몫”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현세의 공식 데뷔작 지위를 이어받아야 할 작품은 「저 강은 알고 있다」보다 2개월 앞서 출간된 「나는 한국인」이다. 이현세는 “습작품, 초기 작품들은 내가 데뷔작이라 인정할 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그때는 이야기 만들기에 급급했고, 캐릭터들의 개성이 없었다. 배우의 중요성을 몰랐다”면서 “당시 화성사는 대본소용 만화로 무명작가인 내 만화를 찍어주었다. 이때 출간한 「나는 한국인」 「저 강은 알고 있다」 등을 내 데뷔작으로 인정할 만한데, 「나는 한국인」이 시기상으로 앞선다면 데뷔작이 되는 것이 맞다”고 설명했다.
「나는 한국인」에서는 세상에 저항하는 이현세 만화의 트레이드 마크인 주인공 까치 오혜성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혜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나는 일전에 춤지에서 ‘「태양을 잡은 소년」, 「오오사까의 한국인」 등과 같은 시기에 나온 「나는 한국인」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이현세 세계관의 핵심인 까치 오혜성 캐릭터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이현세는 1979년 상반기 「나는 한국인」, 「저 강은 알고 있다」 등을 화성사에서 연달아 출간하며 작가로서 완성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 직후 「최후의 곡예사」에서 까치 머리의 원형을, 「시노모세키의 까치머리」에서 오혜성 캐릭터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현세 같은 대작가의 공식 데뷔작이 교체되는 것은 훗날 우리나라 만화사에서도 주목하는 에피소드가 될 것 같다. 지금에서야 이런 발표가 나오다니, 우리나라 만화계의 자료 검증이 얼마나 허술하다는 뜻인가! 체계적인 만화 자료 발굴과 연구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